청천서원

청천서원 소개

사월(沙月) 세거(世居)

성주읍에서 서쪽으로 6km의 거리이며 행정구역으로는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로 대가면 소재지로부터 서남쪽으로 1km쯤 가면 체 모양의 분지 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사월(沙月)이다. 사월(沙月)은 본래 사월방(沙月坊)이었다. 칠봉산(七峯山)을 근원으로 해서 흐르는 작은 시내를 사천(沙川)이라하고 마을 앞에 있는 산을 월명봉(月明峰)이라 하였는데, 사천(沙川)의 사(沙)자와 월명봉(月明峰)의 월(月)자를 취하여 사월(沙月)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 의성김씨(義城金氏)로서 처음 입향조(入鄕祖)는 조선 초기의 교위공(校尉校) 계손(季孫)이다. 공(公)이 북청부사(北靑府使) 배혜(裵惠)의 따님과 결혼함으로써 처가의 마을에 살게 된 것이 입향(入鄕)의 연유가 된다. 공(公)은 벼슬 이 수의교위(修義校尉)였으며, 첨사공(詹事公) 용비(龍庇)의 8세손이며, 문절공(文節公) 용초(用超)의 증손(曾孫)으로 참의공(參議公) 종사(宗師)의 넷째 아들이다. 공(公)의 증조(曾祖) 문절공(文節公)은 고려(高麗)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무예에도 뛰어나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으며, 조선 개국 후 호남병마도절제 사(湖南兵馬都節制使)를 제수받고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봉해진 분이다.



이후 교위공(校尉公)의 증손(曾孫)인 칠봉(七峯) 희삼(希參)선생은 중종35년 (1540)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있으면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남명(南冥) 조식(曺植)과도 교분이 두터웠는데 특히 남명(南冥)은 칠봉(七峯)선생을 두고 "옥같은 지조는 얼음병같다「玉操氷爲甁」”고 예찬하고, 선생의 네 아들을 두고는 '이옥대옥(夷玉大玉)'이라 칭송하기도 하였으며, 늘 차고 다니던 성성자(惺惺子)를 제자(弟子) 동강(東岡)에게 풀어주면서 “내 소중한 보배로써 그대에게 주니 이를 잘 보존할 수 있겠는가! 이 물건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하였다.



중종이 승하(昇遐)한 후 도(道)가 어지러워지자, 선생(先生)은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면서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였다. 이후 선생(先生)은 삼사관(三司館)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요직을 맡았으나 병을 핑계로 그 자리에 오래 있지 않았다. 명종 8년(1553) 사옹원정(司甕院正)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외직(外職)을 청구하여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부임하였다. 정치를 행함에 도(道)를 으뜸으로 삼으면서 백성에게는 자비와 사랑으로 대하니 명령과 형벌이 아니더라도 모든 일이 순조로왔고, 백성들로부터도 칭송이 자자하였다. 아들 넷 중 우홍(宇弘), 우굉(宇宏), 우옹(宇顒)이 문과에 올라 4부자가 대과에 급제한 명예로운 가문이 되었다. 이후 의성김문(義城金門)은 성주 지방에서 명문(名門) 사족(士族)으로서 세거하였으며, 사람들은 사월(沙月)을 사도실(思道室)이라 일컬었는데, 이는 이 마을에서 동강(東岡)과 같은 도학자(道學者)가 출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천서원 이미지

청천서원(靑川書院)

본 서원(書院)은 영조(英祖) 5년(1729) 유림(儒林)들에 의해 창건되어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김우옹선생(金宇顒先生)을 봉향(奉享)하던 곳인데 영조 14년(1738)에 서계김공(西溪金公) 담수(聃壽)와 용담박공(龍潭朴公) 이장(而章)을 종향(從享)하였다. 이 후 고종(高宗) 5년(1868)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하여 훼철(毁撤)되었고, 고종 20년(1883) 12월 경상도 유생(儒生) 김경락(金景洛) 등이 복원(復元)을 주청(奏請)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청천서당(晴天書堂)을 건립, 동강선생만 채례(菜禮)로 받들었다. 그러다가 유림 후손(後孫)등의 헌성(獻誠)으로 임신(壬申:1992)년 4월 26일 복원하였다.



전통 목조 건물로 복원된 현 청천서원은 사우(祠宇)인 숭덕사(崇德寺), 강당(講堂)인 일중당(一中堂), 동재(東齋)인 소원재(遡遠齋), 서재(書齋)인 경성재(警惺齋), 문루(門樓)인 수정문(守正門)으로 구성되어 그 규모를 완비하였다.

제향위(祭享位)

  • 주향(主享) 김우옹(金宇顒)
  • 종향(從享) 김담수(金聃壽)
  • 종향(從享) 박이장(朴而章)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요, 자는 숙부(肅夫)요,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直峰)이다. 중종(中宗) 35년 계유癸酉(1540) 7월에 삼척부사 희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천성이 특출하여 8세 때부터 글을 배워 15세에 침비부(沈碑賦등)을 지어 문학적 역량을 드러내었으며, 명종(明宗) 13년(1558) 진사가 되었고, 명종 22년(156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6년(1573)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부수찬을 거쳐 수찬이 되었고, 선조9년(1576)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 · 사인등을 지냈으며, 선조12년(1579)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그 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명을 받았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듬해 선위사로 일본 사신을 맞이하였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을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선조15년(1582) 홍문관직제학,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선조17년(1584)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 • 이조참판 • 대사성(大司成) • 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선조 22년(1589)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교분이 있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사(贊畫使)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 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중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 • 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32년(1599) 사직하고 인천에 우거하면서 소요정(逍遙亭)을 지어 한가로이 지내고, 다음해 청주 정좌산으로 옮겨 우거(寓居)하다가 선조(宣祖) 36년(1603) 계묘(癸卯) 11월 9일에 64세로 일생을 마치니 향년(享年) 64세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에게 수학하고, 이어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관직에 나아가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대한 시책을 진언하며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평소에 몸이 약한 관계로 선조로부터의 내의원을 통한 약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선조6년(1573) 9월 부수찬으로서 선조앞에서 첫 경연강의를 시작하여 23년동안 마흔 네차례의 강의를 하였는데 그 기록된 어록(語錄)이 3만(万) 7천(千) 여자(餘字)에 이른다. 특히 이 경연강연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이면과 위정자의 정치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聖學六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정지(定志) • 강학(講學) • 경신(敬身) • 극기(克己) • 친군자(親君子) • 원소인(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다. 이어 선조는 (存心養性)이란 네글자를 써주며서 하나의 잠(箴)을 지어 올려라 내두고 보겠노라 하시었다. 또한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宣)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청하여 이의 실현을 보았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학령(學令) • 독법(讀法) • 치경행재(治經行齋) • 택사유(擇師儒) • 선생도(選生徒) • 공사(貢士) • 취사(取士)의 학제칠조(學制七條)를 지었다. 선학(先學)을 존경하여 선조6년(1573) 퇴계이황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사액을 내릴 것도 청하였다.



    또 사특한 이는 벌주고 어진이는 등용하며 억울한 이는 풀어주어야 한다는 상소를 하여 원통하게 죽은 최영경崔永慶 등을 신원(伸冤)하게 하였고,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다음해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천거하고, 선조28년(1595)에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등 33인을 천거하였다. 관직 생활을 하는 가운데 수시로 시무책을 올렸는데 1594년 6월 시무칠조, 7월에 시무사조, 9월에 시무팔조, 이듬해 시무십육조, 선조30년(1597)에는 여지(勵志) • 택상(擇相) • 택장(擇將) • 임관(任官) • 연병(鍊兵) • 적량(積糧) • 신상(信賞) • 필벌(必罰)의 중흥요무팔조(中興要務八條)를 올리기도 하였다. 선생(先生)은 남명 선생의 경의 사상의 가르침을 이어 학문(學問)의 연원을 계승하였으며 밖으로 왜란(倭亂)과 안으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포부와 경륜을 발휘하였다. 또 심학(心學)에도 조예가 깊었음은 물론 문장에도 뛰어나 '동우창목(東愚蒼木)’이라하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와 함께 중고(中古)에 영남(嶺南)의 사대문장(四大文章)이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왕이 매우 슬퍼하여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세자좌빈객 資憲大夫 吏曹判書兼 知經筵 義禁府 春秋館 成均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 大提學 世子左賓客에 추증되었으며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공로(功勞)로 참록호성공신종일(參錄扈聖功臣原從)을 명증(明證)받았다.



    광해군 8년(1616)에 먼저 회령(會寧)의 사림(士林)이 오산서원(鰲山書院)을 건립하여 제향하였고, 이어 종성(鍾城)에 동강사(東岡祠)와 경성(鏡城)에 함지서원(咸池書院)을 세워 제향(祭享)하였으며, 숙종 27년(1701)에는 청주(淸州)에 鳳書院을 건립하여 제향(祭享)하였다. 그후 인조 6년(1628)에는 성주(星州)의 사림(士林)들이 회연서원(會淵書院)에 선생의 위판을 봉향했다가 청천서원(晴川書院)을 신축하여 제향하고, 경남 진주시 압현(狎峴)에 용강서원(龍江書院)을 건립하여 지금까지 제향(祭享)하고 있다. 숙종 17년(1691) 문정(文貞)이란 시호(諡號)를 내리니 문정(文貞)의 '문(文)'은 '도덕박문왈문(道德博問曰文)' 이요, 문정(文貞)의 '정(貞)'은 '청백자수왈정(淸白自守曰貞)'이라는 뜻이다. 경종 3년(1723)에 선생의 신도비(神道碑)를 묘지 입구에 건립하였으니 비문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지었으며, 글씨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글씨를 채자(採字)하여 새겼다고 한다.



    현종 2년(1661)에 선생(先生)의 문집(文集)이 완성되었는데, 원고(原稿)의 대부분이 동강(東岡) (考槃) 양정사(兩精舍)에 소장되어 있었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정사(精舍)와 같이 독서차기(讀書箚記)와 예의답문(禮疑答問)등 많은 책이 소실(燒失)되고 말았다. 이 가운데 남은 것과 만년(晚年)에 저술한 것을 합하여 수십 권에 불과하나 미수(眉叟) 갈암(葛庵) 양선생(兩先生)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그 후 1976년에 선생의 문집을 영인(影印)하게 되어 당시에 다시 별집(別集) 1권, 유집(遺集) 1권, 연보별본(年譜別本) 1권을 증보(增補)하여 총 24권으로 인출(印出)하여 세상에 널리 보급하게 되었다.



    속강목(續綱目)은 선생이 51세 때인 선조 23년(1590) 11월에 회령적소(會寧謫所)에서 집필하기 시작하여 선조 28년(1595) 3월에 집필을 마쳐서 집필한 지 6년만에 완성을 보았다. 권수(卷數)는 13권이며, 그 내용은 송(宋) 태조(太祖) 원년(元年)부터 명(明) 태조(太祖) 원년(元年) 직전까지의 송(宋) • 원(元) 양조(兩朝) 407년간의 중국역사를 기술(記述)한 것이다. 영조 47년(1771) 동궁(東宮)으로 있던 정조가 선생의 속강목(續綱目)을 진람(進覽)하고는 크게 칭찬하면서 규장각(奎章閣)에 명령하여 처음으로 활자로 인쇄하게 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정조(正朝)는 1785년 을사(乙巳) 2월에 친히 제문을 지어 전교를 내렸는데 "내가 잠저에 있을적부터 갈기분천(渴驥奔泉) 공(公)을 앙모하였는데 평생동안 힘을 쏟아온 것은 『속강목(續綱目)』의 편찬이로다” 하였다.
    순조 8년(1808)에는 왕명(王命)으로 속강목(續綱目)을 다시 간행(刊行)하게 되었는데, 당초 선생의 수편본(手編本) 12권이었으나 매권(每卷)을 상(上) • 중(中) • 하(下)로 나누어 36권으로 간행하였다. 1996년 후손들의 헌성(獻誠)으로 선생과 관련된 모든 문적 및 기록을 수집하여 영인하고, 이를 다시 한글로 번역하여 동강전서(東岡全書)라는 책명으로 양장본 10책 1질로 출간하였으니, 이로써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어느 때 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 조선 선조때의 학자로 본관은 의성이요, 자는 태수(台叟)요, 호는 서계(西溪)이다. 경상도 성주출신으로 아버지는 참봉 관석(關石)이다. 어려서는 남명(南冥) 조식(曹植)선생을 사사(師事)하였고, 오건(吳健)에게서 『심경』 • 『근사록』을 배웠으며, 황준량(黃俊良)에게서 『중용』과 『대학』을 강론하였는데 모두 직극한 칭찬을 받았다.



    김우옹(金宇顒) • 정구(鄭逑)와 도의로 사귀었고, 벗을 사귐에서는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선행을 즐겼으며, 모든 행실이 겸손하였다. 특히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있었다. 명종19년(1564) 사마시에 합격하 였으나 건강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두문불출, 경전공부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항상 가내 법규를 엄중히하여 친척간에 친애함과 불의를 행하지 말 것을 강조하여 우애가 돈독하였다. 선조24년(159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선조(宣祖)께서 황계처사(黃溪處士) 호(號)를 하사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친과 함께 가야산으로 피난하면서도 군량 조달등을 주선하여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보이기도 하였다. 주로 도학을 닦고 후학의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선조36년(1603) 향년 69세로 세상을 마쳤다. 상주의 낙암서원(洛巖書院)에 제향되고 서계일고(書溪逸稿) 3권 1책이 전한다.



    선조24년(159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선조(宣祖)께서 황계처사(黃溪處士) 호(號)를 하사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친과 함께 가야산으로 피난하면서도 군량 조달등을 주선하여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보이기도 하였다. 주로 도학을 닦고 후학의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선조36년(1603) 향년 69세로 세상을 마쳤다. 상주의 낙암서원(洛巖書院)에 제향되고 서계일고(書溪逸稿) 3권 1책이 전한다.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이요, 자는 숙빈(叔彬)이요, 호는 용담(龍潭) 또는 도천(道川)이니 승지 양좌(良佐)의 아들이다.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고, 23세에는 남명(南冥) 조식(曹植)선생을 찾아 덕산(德山)에 갔으며, 선조 5년(1572)에 향시(鄕試)에, 이듬해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선조 7년(1574)에 노수신(盧守愼)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한때 영숭전창봉(永崇殿參奉)으로 나아갔으나 곧 사직하고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1586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합격하여 승문원정자 • 홍문관수찬 • 교리등을 지내고 선조24년(1591)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선조34년(1601) 성균관전적 • 상의원정을 지내고 이듬해 집의 • 홍문관직제학겸 시강원보덕 • 동부승지 • 참찬관을 역임하였다. 선조36년(1603)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대사헌 • 이조참판 • 부제학을 지냈다. 이듬해 대사간이 되고 이어 동지춘추관사 • 대사성을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광해군7년(161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직되었다. 그뒤 성주로 내려가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경상도 초계(苕溪)에서 세상을 떠났다. 용담집(龍潭集) • ᆞ정서절요(程書節要) • 육경여해(六經餘海)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