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 김창숙

심산의 생애

  • 출생과 유학사항
  • 독립운동
  • 민주화 운동
  • 교육활동
  • 한주학파와 유학사상

    심산 김창숙은 1879년 7월 10일 경북 성주군 대가면에서 부친 김호림과 모친 인동 장씨의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 자는 문좌, 호는 직강·심산·벽옹 이다. 부친 김호림은 계급과 신분제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개혁적 성향의 유학자였으며 김창숙은 1896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모친의 훈계를 받고 본격적으로 유학 공부를 시작 하였다.

    심산 김창숙은 당시 대유학자인 면우 곽종석, 대계 이승희, 회당 장석영 등 한주학파 유림들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3대조인 김우옹과 남명 조식의 학풍을 이어 받았다.

    한주학파는 한주 이진상을 중심으로 진취적이고 개방적 성향으로 항일 운동에 앞장서게 되는데, 김창숙은 한주학파를 통해 성리학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서양문물과 새로운 시대 사조를 수용하는 진취적인 사상을 갖추게 되었다.

    구국운동

    “이 역적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
    “나라를 구하려면 모든 구습을 개혁하고 구습의 개혁은 계급타파로부터 시작해야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창숙은 스승 이승희와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처단 및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상소문 [청주적신파늑약소]를 올렸다. 이후 1908년 성주 향사당에서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단연 동맹회를 결성해 국채보상을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이 모금액으로 청천서당에 근대 학교인 성명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909년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을 규탄하는 [일진회성토건의서]를 중추원에 제출하여 8개월동안 구금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서는 “선비로서 세상을 사는 것은 큰 치욕"이라며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 모친의 훈계로 마음을 되돌려 4,5년간 학문에 전념하며 독립 운동의 길을 모색하였다.

  • 파리장서운동

    국내에 배포된 파리장서 한문본

    • 국내에 배포된 파리장서 한문본

    김창숙은 3.1운동에 유림 민족 대표로서 참석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유림을 규합해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파리장서운동을 계획했다.



    “우리 한국은 유교의 나라로, 진실로 나라가 망한 원인을 궁구한다면 바로 이 유교가 먼저망하자 나라도 따라 망한 것이다. 지금 광복운동을 인도 하는 데에 오직 세 교파가 주장하고소위 유교는 한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들이 이런 나쁜 명목을 덮어썼으니 무엇이이보다 더 부끄럽겠는가?”



    김창숙은 곽종석, 김복한 등 유림 대표 137명이 서명한 파리 장서를 가지고 상하이와 북경을 거쳐 파리로 가기 위해 출국했다. 김창숙은 상하이에서 이 장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민족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보내고 국내 각 향교에는 한문본을 배포했다. 또한 중국의 언론, 정계, 각 국의 대사와 영사, 공사 등에도 배포하였다.

    임시의정원 활동

    제 6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들

    • 제 6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들

    북경에서 활동 당시 심산 [좌측]

    • 북경에서 활동 당시 심산 [좌측]

    김창숙은 파리로 가는 대신 상하이에 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특히 대중국 관계에서 활약하는데, 중국의 정치 지도자 및 학계, 언론계 인사 및 외교관을 교섭해 독립 운동을 위한 여러 편의와 지원을 이끌어냈다.



    1920년에는 상하이에서 박은식과 사민일보를 발간하고, 베이징에서는 신채호와 천고를 발간해 독립운동 선전 활동을 전개한다. 베이징으로 활동지를 옮긴 심산은 1921년 무장 독립단체인 보합단에 참여해 활동하였으며 이승만의 위임 통치를 비판하는 성토문을 발표한다.

    독립군 기지 개척 및 군자금 모금

    군자금 모금 계획을 세운 김창숙의 귀국 경로

    • 군자금 모금 계획을 세운 김창숙의 귀국 경로

    1925년 봄, 김창숙은 이회영, 신채호와 내몽고의 황무지를 개간해 독립군기지를 개척할계획을 세웠고, 8월 신채호에게만 알리고 국내로 잠입해 신건동맹단을 결성하고유림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은다. 서울, 대전, 대구, 울산 등 지방을 오가며 모금을 하던 중 허리를 심하게 다치게 되고, 손후익의 집에 머무르며 활동한다.



    1926년 3월, 계획만큼 군자금을 모집하지 못한 김창숙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나석주를 국내로 파견한다.



    “나는 앞으로 행장을 정리하여 해외로 나가서 해외에 있는 동지들과 함께 재기할 방법을도모할 것입니다.(중략) 이 돈은 의열단원의 결사대 손에 직접 전해주어 왜정의 각 기관을파괴하고 친일의 여러 부자를 박멸하여, 이로서 우리 국내의 민기를 고무할 것입니다.국내에 계신 동지 여러분은 만약 그 기회를 타고 일제히 분기한다면 누가 감히 혁명가의호령에 응하지 않겠습니까?”



    나석주는 국내에 잠입해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했고 일경과의총격전 끝에 자결했다.

    피체와 옥중투쟁

    검사국으로 송치되는 김창숙

    • 검사국으로 송치되는 김창숙

    1926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뽑혔으나 이듬해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옥중에서 장남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이 깊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고문에 굴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포로라 표현하며 변호사의 변론을 거부하는 등 일제의 모든통치 체제를 부정하였다.



    “일본의 조선 통치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고 있는 나로서 일본 법률을 가지고 죄의 유무를변론 해 주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법률론자가 대한인 김창숙을 변호할 수 있겠는가? 나는 포로다.”



    1927년, 14년형을 선고 받은 김창숙은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7년 3개월의 수감생활 후 1934년경 지병 악화로 형 집행정지로 출옥한다.



  • 통일 민주화 운동

    통일 정부 수립 운동 중 김구 등과 함께

    • 통일 정부 수립 운동 중 김구 등과 함께

    4.19 후 장면 총리와의 면담

    • 4.19 후 장면 총리와의 면담

    김창숙은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 정부가 수립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김구와 함께 민족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민족단결이 가장 급선무다. 그 단결의 방법은 반드시 먼저 인민공화국을 해산하고, 좌익 우익의 구별을 타파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치아래 모두 모아서 그 당면정책 14개조항을 받아들여실천할 것, 이것이 실로 오늘날 우리 국가 민족의 다행이 될 것이라”(1945년 12월)



    “내가 듣기에 60여 정당이 조직되어 있다 하니, 어찌 정당이 이렇게도 많은가? 나라와 강토는 아직 완전히 수복되지 못하였고, 정식 정부 역시 성립을 보지 못한 이때에, 정당의 어지러운 싸움이이와 같이 심한 지경에 이르러서 저 60여 당이 만약 정권과 정책을 서로 다툰다면, 새로 일어날 대한민국이 필연 저네들의 손에서 다시 망하게 되지 않을까 두렵도다.”



    김창숙은 이승만 정부에 대항하며 하야 경고문을 발표했고, 이로 인해 1952년 부산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40일간 옥고를 겪었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야권후보단일화를 추진하였으나 실패한 이후 고향 성주에서 지내던 김창숙은 1958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손자 등에 업혀 상경하고 민주화 운동을 벌였다.

  • 교육활동

    성균관대학 제1회 졸업 기념 (1952.5.11)

    • 성균관대학 제1회 졸업 기념 (1952.5.11)

    성균관대학 총장 시절 김창숙

    • 성균관대학 총장 시절 김창숙

    김창숙은 광복 후 일제강점기 친일협력단체로 전락했던 성균관의 복원 및 일제 잔재 청산에 성공한다. 1945년 전국유림대회에서는 김창숙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해 유림 단체를 통합하고유교계를 혁신했다. 1946년 6월에 열린 전국유림대회에서 성균관의 명칭을 환원하고 유도회를 교화사업 기구로 설치하였고, 김창숙은 성균관장·유도회 총본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또, 김창숙·정인보 등 22인으로 구성된 성균관대학설립기성회는 9월 25일 유학 정신을 건학 이념으로 하는 성균관 대학을 설립하고 철정과(哲政科)와 경사과(經史科) 2개 과를 설치하였으며,김창숙이 초대 학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부산에서 성균관대학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향교 재단을 통합하여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김창숙은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우리나라 청년 학도의 기백이 없음을 한탄한다. 제군들이 만약 청년다운 정열과 순진성을 가졌다면 절연(截然)히 정사(正邪)를 판단하여 사(邪)를 물리치고 정의를 바로 잡으려는 기개와 용기가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정의감은 청년의 청년다운 소이(所以)이며, 개(個)의 발전과 전체의 복지를 위한 불가결의 원동력이라 하겠다.”